유럽 에너지 위기, 따뜻한 겨울과 장작 사재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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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럽에서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장작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가스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한 시민들이 벽난로용 장작을 대량 구매하면서 가격이 폭등했고, 급기야 국립공원에서는 장작에 GPS 추적기를 심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에너지 위기의 원인을 러시아의 가스 공급 차단으로만 생각하지만, 초기 도화선은 기후 변화로 인한 '바람의 실종'이었다. 2021년 후반 북해와 아일랜드 인근 해상의 풍속이 수십 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해상풍력 발전량이 바닥을 쳤다.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천연가스 발전기를 돌리면서 가스 가격 폭등의 1차 원인이 되었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 선택한 재생에너지가 기후 변화 때문에 가동을 멈추고 화석연료 의존도를 높이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푸틴의 '동장군' 카드가 지구 온난화라는 뜻밖의 변수 때문에 무력화됐다.
러시아가 가스를 무기화하며 혹독한 겨울을 예고했지만, 2022년과 2023년 겨울 유럽은 역사상 가장 따뜻한 이상 고온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에 기대는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과거의 위기를 역내 공조와 LNG 대체재 확보로 방어해냈으나, 최근에는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와 기후 변화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 등으로 네덜란드 TTF 기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며 겨울철 수급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폭염과 가뭄으로 강 수위가 낮아져 원자력 발전소 냉각수 부족과 라인강 등 주요 운송로 마비가 반복되는 악순환도 발생하고 있다. 유가 급등으로 아일랜드 등에서는 대규모 유가 항의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EU는 겨울철 안정화를 위해 가스 저장시설을 90% 이상 채우도록 하는 규정을 2027년까지 적용하며 충격 흡수력을 높이고 있다. 과거 파이프라인 가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구조에서 탈피해 미국, 노르웨이 등으로 LNG 수입을 다변화했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전력 생산의 20~40% 대를 돌파하며 핵심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탈원전을 선언했던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벨기에 등 주요국들이 원전 수명 연장 및 신규 건설로 선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 국면에서 유럽은 미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푸틴 편을 들자, 유럽은 협상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태세 전환에 나서고 있다.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차단 사례처럼 민간 기업까지 지정학 갈등의 도구로 활용되는 상황이다. 겨울을 앞두고 에너지와 식량 위기가 겹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미국과 러시아가 사실상의 항복을 강요하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